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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알기! 권남 보고 정식으로! 자갈색쟁반버섯 에 대해 알아봅시다가셔유

by zss2v4y6wos6 2020.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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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 자실체의 크기는 1.
5~3cm, 컵모양에서 접시모양으로 됩니다.
표면의 자실층은 밋밋하고 습기가 있을 때 광택이 나며 자갈색이며 오래되면 약간 퇴색합니다.
아래의 바깥 면은 다소 연한 색이고 밋밋하지만 미세한 쌀겨모양입니다.
가장자리는 약간 물결모양을 이루며 어릴 때는 안쪽으로 말린다.
포자의 크기는 15~19×8~9㎛이고 타원형이며 표면은 매끈하고 투명하며 간혹 점 같은 사마귀가 덮여 있습니다.
자낭은 200~250×10~15㎛로 막대형이고 8-포자성이며 포자는 일렬로 배열합니다.
측사는 원통형이고 격막이 있고 선단은 약간 막대형으로 두껍다.
생태 : 가을 / 숲속의 풀밭, 맨땅에 군생참고 : 희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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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사실 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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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듣건대, 뿌리가 깊은 나무는 가지가 반드시 무성하고 근원이 먼 물은 갈려나간 물줄기가 반드시 긴 것은 떳떳한 이치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벗 권공(權公)의 휘(諱)는 남(擥)이고, 자(字)는 정경(正卿)인데, 그의 선조는 본래 김씨(金氏)였다.
한 명제(漢明帝) 영평(永平) 8년인 을축년(乙丑年, 서기 65년 신라 탈해왕 9년)에 알지(閼智)가 시림(始林, 계림(鷄林))에서 태어나 김씨로 일컬었는데,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
그의 후예가 박씨(朴氏), 석씨(昔氏)와 더불어 번갈아가며 신라(新羅)의 왕이 되었다.
그 뒤 안동 군수(安東郡守) 휘 행(幸)이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만나 비로소 권씨(權氏)의 성을 하사받음과 아울러 안동부(安東府)를 식읍(食邑)으로 받았고 벼슬이 삼한벽상삼중대광 태사(三韓壁上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다.
그 뒤 9대를 지나 복야(僕射) 휘 수평(守平)은 청렴과 덕행으로 세상에 저명하였고, 복야가 한림 학사(翰林學士) 휘 위(韙)를 낳았는데 비로소 과거에 합격하고 예절을 잘 안다고 알려졌으며, 한림 학사가 찬성(贊成) 휘 단()을 낳았는데 4개 군(郡)의 수령을 지내고 5개 도(道)의 안찰사(按察使)를 지내면서 부임한 곳마다 청렴과 공평으로 일컬어졌으며 호는 몽암(夢菴)이고 시호는 문청(文淸)입니다.
문청의 아들 시중(侍中) 휘 부(溥)는 공로와 덕행이 세상에 으뜸이었고 영가 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영가는 곧 안동(安東)입니다.
호는 국재(菊齋)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인데, 휘 고(皐), 휘 희(僖) 3대가 대대로 봉작(封爵)을 이어받았습니다.
권희의 아들 휘 근(近)은 성리학(性理學)으로 우리 동방의 사람을 깨우쳤는데,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이 선배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나 명 태조 고황제(明太祖高皇帝)가 한번 보고 존경하였으므로 명성이 중국에 드날리었다.
벼슬이 추충 익대 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으며, 호는 양촌(陽村)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인데, 순충 적덕 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문충공의 아들 휘 제(踶)는 옛이름은 도(蹈)로, 문장이 대를 이어 장원에 발탁되었고 우리 세종(世宗)의 신임을 받아 벼슬이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호는 지재(止齋)이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며 순충 적덕 병의 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길창 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공의 선고(先考)인데, 모두 공의 귀(貴)로 인해 추증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 정경 부인(貞敬夫人)은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이준(李儁)의 딸입니다.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병신년(丙申年, 1416년 태종 16년) 5월 을미일(乙未日)에 공이 태어났다.
영평(永平) 을축년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저 1천여 년이 지나는 동안 대대로 현인(賢人)이 나 고관 대작(高官大爵)을 하였으니, 앞에서 말한 것처럼 뿌리가 깊은 나무는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먼 물은 갈려 나간 물줄기가 깁니다는 게 아니겠는가?공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지식이 해박하고 뜻이 커 기발한 계책이 많았습니다.
책을 싣고 명산(名山)이나 고적(古蹟)을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었고 갈 때마다 반드시 상당(上黨) 한 자준(韓子濬, 한명회(韓明澮))공과 같이 갔는데, 가는 곳마다 머물러 글을 읽고 글을 지으며 회포를 달래었다.
나이 35세가 되도록 벼슬하지 않고 항상 쓸쓸하게 기이한 유람만 일삼다가 사람들이 과거를 보라고 권하자 일거(一擧)에 삼장(三場)의 장원을 하였습니다.
지금 주상(세조)이 그때 대군(大君)으로 명을 받아 무경(武經)의 주석을 내고 있을 때 공이 시종(侍從)이 되었는데, 주상이 공에게 큰 재주가 있는 것을 알고 매우 친근히 대하였습니다.
그때 권력을 장악한 간신(姦臣)이 세력을 휘둘러 사직(社稷)이 위경에 놓이자 공이 맨 먼저 대계(大計)를 건의하고 또 한 자준을 추천하였습니다.
주상이 두 공에게 기획을 위임하고 충의(忠義)의 인사를 모집하여 동분 서주(東奔西走)한 끝에 대란(大亂)을 평정하고 나서 그 공로의 보답으로 수충 위사 협책 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의 작호를 하사하고 주상이 왕위(王位)에 올라 또 동덕 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작호를 하사하였는데, 모두 일등 공신(一等功臣)이었다.
이보다 앞서 간당(奸黨)이 서로 짜고 안팎에서 번갈아 선동하여 사나운 불꽃이 치성할 때 조그만 병력에도 의뢰하지 않고 한갓 충의(忠義)의 마음만으로 분기하였으니, 비록 천명(天命)이 돌아와 진주(眞主)가 운에 호응했습니다 하더라도 공이 지략과 덕망으로 선후(先後)에서 선양하지 않았습니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찬성하여 행동을 같이 취해 짧은 시간에 이처럼 숙청하여 종사(宗社)를 안정시킬 수 있었겠는가? 정난(靖難)과 좌익(佐翼)의 일등 공신이 되는 게 당연합니다고 하겠다.
공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습니다.
국법(國法)에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관례에 따라 잔치를 열어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공이 어머니를 위해 영친연(榮親宴)을 열었는데, 학발(鶴髮)이 중당(中堂)에 계시고 수레가 문전(門前)을 꽉 메웠다.
주상이 그때 영의정(領議政)으로 영친연에 참석하여 친히 공의 어머니에게 축수(祝壽)하였으므로 온 세상이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임명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하였는데, 길창 또한 안동입니다.
주상이 왕위에 오르자 공이 고명(誥命)을 요청하기 위해 연경(燕京)에 갈 때 숙주(叔舟)도 같이 갔었다.
공의 인품이 풍만하여 바라볼 때 도덕(道德)과 도량(度量)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중화(中華)의 사람들이 너나없이 사모하고 존경한 바람에 결국 고명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주상이 기뻐하여 그때 사절로 같이 갔던 사람들에게 모두 원종 공신(元從功臣)의 작호를 하사하고 공은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어 이조 판서(吏曹判書),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었다.
그 뒤 누차 승진되어 숭정 대부(崇政大夫) 판중추원사 겸판이조사(判中樞院事兼判吏曹事)가 되었다.
공이 어려서부터 기운이 허약하여 복잡한 일을 싫어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쉴 것을 요청하자 주상이 손수 편지를 써서 답하기를, “경과 나 사이에는 마음을 알고 덕이 합치된 것으로만 논할 것이 아니라, 하늘이 실로 탄생시켜 (대임(大任)을 맡겼는데,) 경에게 조그만치라도 사심이 있거나 나에게 조그만치라도 욕심이 있어서 물불을 안 가리고 자신과 처자식을 잊으면서까지 하늘과 땅에 맹세하여 마침내 화란(禍亂)을 평정하였겠는가?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경이 실로 공업(功業)의 주인입니다.
그런데 지금 경이 초야에 뜻을 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탄식함을 마지아니합니다.
경이 어떻게 하늘이 부여한 책임을 벗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우찬성(右贊成)에 임명하였습니다가 얼마 안 되어 대광 보국(大匡輔國) 우의정(右議政)으로 임명하고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되었다.
정난(靖難, 계유 정난(癸酉靖難))한 처음에 간당을 축출하고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여 잘못된 것과 어수선한 것을 정리할 때 공이 실로 건의해 은밀히 도왔었다.
의정(議政)이 되자 관대하고 화평하며 엄격하고 묵중하되 기존의 법을 애써 따라 대체(大體)를 유지하면서 자잘한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끝까지 펼쳐보지 못하고 결국 병환으로 의정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쟁점(爭點)이 되는 군국(軍國)의 일은 모두 관원을 보내어 자문하였고 문병(問病)의 사자(使者)가 도로에 끊이지 않았습니다.
공의 병환이 위독하자 내의(內醫)가 곁에서 약시중을 들고 태관(太官)이 음식을 제공하는 등 여러모로 지극하였습니다.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원년(元年)인 을유년(乙酉年, 1465년 세조 11년) 2월 갑신일(甲申日)에 세상을 떠났는데, 주상이 매우 슬퍼하여 고기 반찬을 들지 않고 조회를 중지하였으며 부조를 더 보내고 관청에서 장례(葬禮)를 치르도록 하였습니다.
대소(大小)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도로에 탄성(歎聲)이 가득하였고 친구들이 동분 서주하면서 통곡하였습니다.
숙주가 매양 공과 같이 ‘너무나 지위가 높습니다’고 하여 앞다투어 물러가려고 하였는데, 공이 결국 먼저 속세를 떠나 조용히 정신을 수양하기에 장수(長壽)를 누릴 것으로 여기었다.
그런데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천도(天道)도 믿기 어렵다고 하겠다.
이보다 앞서 공이 물러갈 때에 임명의 교서(敎書)가 야간(夜間)에 하달되었다.
숙주가 일어나 그 교서를 보고 앉아서 조회(朝會)할 때까지 기다렸는데, 공이 과연 시 몇 편을 지어 스스로 자랑하기를, “이제부터 한 승상 부러워 않고 혼자서 필마로 서호를 왕래하리[從今不羨韓丞相匹馬西湖獨往還]”라고 하였습니다.
숙주가 그 시를 보고 망연 자실(茫然自失)하였는데, 일찍이 공과 같이 해마다 봄놀이를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공의 저택이 남산(南山)의 기슭에 자리잡았는데, 그곳에서 도시(都市)를 내려다보면 활짝 꽃술을 터뜨린 붉은 도화(桃花)와 하얀 이화(李花)가 책상머리에 찬란하게 펼쳐졌다.
공과 같이 한번 자리를 펴 본 뒤로 숙주는 연달아 북진(北鎭)에 도체찰사로 나갔고 돌아와서는 공무에 시달린데다가 공마저 병환이 나 오늘날 다시금 약속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숙주도 본래 마음먹은 대로 중책(重責)을 벗어버리면 차분히 노닐 수 있을 터인데 일이 죽음과 같이 떠나버려 다시는 추심할 수 없으니, 슬프기만 합니다.
공의 부인 이씨(李氏)는 문정공(文貞公) 이암(李嵓)의 손자인 철성 부원군(鐵城府院君) 이원(李原)의 딸인데, 영원군부인(寧原郡夫人)에 봉해졌다.
2남 8녀를 낳았습니다.
큰아들 권걸(權傑)은 보공 장군(保功將軍) 행충좌위호군(行忠佐衛護軍)이고 둘째 아들 권건(權健)은 아직 어리다.
큰딸은 추충 정난공신(推忠靖難功臣) 청원군(淸原君) 한서귀(韓瑞龜)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우사어(右司禦) 박사화(朴士華)에게 시집가고 셋째 딸은 사헌 감찰(司憲監察) 신억년(申億年)에게 시집가고 넷째 딸은 행호군(行護軍) 남이(南怡)에게 시집가 공보다 먼저 죽었고 다섯째 딸은 풍저창 직장(豊儲倉直長) 김수형(金壽亨)에게 시집가고 그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시조로부터 대대로 혁혁하고 남은 경사가 공에게 이르러 더욱더 커졌는데, 이미 크게 해 놓고 수명을 넉넉히 주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일찍이 들어본 바에 의하면 ‘후하게 베풀면 융성한 보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공이 쌓은 덕과 전래된 복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아 가지가 무성하고 물줄기가 깁니다는 것을 이미 징험하였으니만큼 또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예상할 수 있겠다.
이해 4월 정유일(丁酉日)에 충주(忠州)의 관아 서쪽 미법곡(彌法谷) 선영(先塋)의 밑에다 장례를 치르고 그 이듬해 가을에 비석을 다듬어 공의 공훈과 덕업을 오래 전하기 위해 공의 사위 청원군이 나에게 찾아와 묘비명(墓碑銘)을 써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아! 공의 이력과 공훈은 주상의 보살핌이 돈독하시어 저절로 국사(國史)에 기록될 것이니, 본디 자세히 쓸 겨를이 없겠기로 집안에서 효도하고 우애한 것이나 친척과 친구들에게 각기 도리를 다하여 대우한 것에 대해서만 기록하려는데 비록 죽백(竹帛)을 쌓아놓더라도 다 쓸 수 없기에 대략 서술하여 돌려보냈는데, 결국 애통하고 애석할 뿐입니다.
숙주의 나이는 공과 비슷하고 머리를 묶을 때부터 같이 놀았습니다.
매양 공과 농담하면서 앞다투어 서로가 상대방의 묘지명(墓誌銘)을 써 주겠다고 하였는데, 지금 과연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아! 구천(九泉)에 있는 공이 살아납니다면 무어라고 말할는지 모르겠다.
아! 애통합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권공의 시조는 먼 옛날 시림(始林)에서 나왔다 하였지.
고려(高麗)가 건국할 초기에 김씨를 권씨로 고쳤도다.
경사 쌓아 영광이 전래하니 고관 대작 줄줄이 계승했도다.
어떤 분은 공덕(功德)을 세우고 어떤 분은 문장(文章)을 잘하여, 아름다운 향기를 전수합니다 공에게 이르러 더 커졌도다.
뿌리와 근원이 깊고 머니 가지와 물줄기 줄기차도다.
권공이 처음에 분발하여 책읽기를 업으로 삼아, 출중하여 얽매이지 않고서 산하로 떠돌아다녔도다.
일거에 삼장(三場)에서 장원하니 드물고도 기이한 사적이도다.
큰 것을 깨달은 군자(君子)는 이른바 이처럼 하였도다.
권간(權姦)이 국권을 훔쳐 쥐니 호흡 따라 춥거나 뜨거웠도다.
권력을 장악하여 농간하매 종사[宗祏]에 화란이 미쳤는데, 하늘이 동방[大東]을 돌보시어 우리 성군을 탄생했도다.
협찬하여 같이서 구제하라 훌륭한 보필을 주시었도다.
천명과 인심이 돌아오니 영향(影響)이나 불나방처럼 호응했지.
간교한 흉적들을 섬멸하고 당시의 인걸을 발탁했도다.
헝클어진 것들을 정리하고 막힌 곳을 뚫어서 통했도다.
저들의 침탈을 제거하고 우리의 은택을 펼치었도다.
의정부에 정승으로 들어가니 도덕이 넓고도 위대했도다.
임금에게는 시귀(蓍龜)1)와 같았고 나라에는 주석(柱石)과 같았도다.
하늘이 어이하여 봐주지 않고 향년을 촉박하게 하였는고? 진정으로 농담을 나누니 교칠(膠漆) 같은 망형(忘形)의 벗이었도다.
2) 권공이 애석하고 애통한 것은 공적이나 사적이나 똑같도다.
아! 슬프도다 권공이여, 여기서 그치고 말았는가? 사생(死生)이 변화(變化)로 이어지니 가는 이는 머물지 않도다.
동산(東山)에 봄철이 지나가니 서주(西州)에서 통곡을 하였도다.
덕업과 공훈을 기록치만 부끄럽게 큰 솜씨가 없어서, 평소의 심정만 열거하여 후세의 사람에게 보

권남희

 

권남우

 

권남

 

권남기